살며 사랑하며

뚜벅이 여행 - 종로 교남동

dextto™ 2013. 3. 2. 22:07


  날이 풀리나 싶더니 다시 쌀쌀해졌다. 그래도 3일 연휴의 첫날을 회사에서 보냈으니 오늘은 외출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아침부터 늦잠자는 아내를 깨워 아침을 차려먹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얼마 전에 종로 구청에서 받은 종로 골목길 관광코스 중 7코스 교남동’.

  지도의 추천코스에는 서대문 4번출구로 나가라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3번 출구로 나가 경교장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는 돈의문 뉴타운으로 지정된 구역이어서 빈집이 많고 거리엔 이사하고 나서 버려진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차가운 바람이 불어 동네는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경교장길을 나와 먼저 경희궁으로 향했다.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리는 경희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과는 달리 복원이 되지 않아 조금 초라해 보였다.

(경희궁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지나는 길에 경찰박물관에 들러 잠시 관람도 하고,

(유치장 체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돈의문(서대문)을 지나 경교장 (京橋莊)으로 향했다.


  사적 제465호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마침 오늘이 그 원형을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한 첫날인데다, 어제가 3.1절이어서 방문에 그 뜻이 더욱 깊었다.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

(응접실)

(김구 선생의 침실)

(김구 주석이 돌아가신곳. 이곳에서 김구가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미군병첩대(CIC)요원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창문에 총알이 날아든 것을 다시 복원해 놓았으니 한 번 찾아 보시길.

(회의를 진행하는 김구 선생의 모형)

(김구 선생의 혈의)

(김구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 지금과 모양이 조금 다르다)


  지하 1층 벽에 가슴이 뜨거워 지는 글귀가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나의 소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중에서


  경교장을 나와 출출한 배를 채우러 유명하다는 맛집 "대성집"을 찾아 갔다. 소문대로 도가니탕 맛이 일품이었다. 특히 간장소스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짜지도 않고 간이 적당한 게 도가니가 입에서 살살 녹게 도와준다.


  다시 송월2길로 올라와 걷다 홍난파 가옥을 만났다. 토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라고 하여 들어가질 못했다.


  길의 끝에는 권율장군 집터와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유교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이를 따라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졌다고 했는데, 이 나무도 그 이유로 심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420살이 넘는다고 하는데 보통 때는 열리지 않던 열매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려면 미리 알고 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맞은 편에는 '딜쿠샤'라고 하는 집이 있다. UPI 특파원으로서 한국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 테일러의 집이라고 한다. 그는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일로 일제에 의해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세상을 떠난 후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혀 있다고 한다.


  교남동 여행을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정동길을 따라 내려 온 덕수궁 앞은 오늘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집회 중인 천막이 설치되어 있다. 아까 서울시 교육청 앞에는 강제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문앞에서 천막도 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더니...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대선에서의 불법성(국정원 개입)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동참하는 이가 적다. 너무도 안타깝다.


  어제는 3.1절이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피흘렸던 순국 선열들과 그 자손들은 아직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에 충성하며 일신의 안위를 꾀했던 자들은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고, 해방 조국의 치안과 행정을 맡으며 아직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먼저 역사가 바로 서야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 땅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적어도 내 자식들에게는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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